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단 편집) ==== 미국에서 제시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의혹 ====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시기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지지하는 노엄 촘스키나 에드워드 허만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몇몇 의혹이나 추정되기도 했다. 촘스키와 허만이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추정하며, 그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소위 여기서 악착같이 강하게 반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한겨레나 구수정씨의 조사자료가 아닌, 당시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있던 외신 기자들이나 그 지역 지원 봉사단체들을 통해, 한국군의 최소 43건 이상의 크고 작은 미라이 학살 사건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촘스키와 허만에 따르면 한국군은 1965년과 1966년 서방의 뉴스 보도에서는 미국의 동맹군으로써 '''용맹''' 혹은 '''강력하다'''고 표현됐는데, 1970년 1월 당시에는 한국군에 대해 강력하다고 표현되던 것이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적인 살상에 기반한 것임이 일반인들에게 폭로됐다고 한다. 1970년 1월 뉴욕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한국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마을에서 무조건 1/10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Robert M. Smith, “Vietnam Killings Laid to Koreans,” New York Times (10 January 1970). [[https://www.nytimes.com/1970/01/10/archives/vietnam-killings-laid-to-koreans-researcher-says-he-found-evidence.html|기사 링크는 여기]] ] 그러나 1972년이 될 때까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데, 당시 베트남어를 했던 두 명의 퀘이커 교도인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는 5년 동안 한국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작전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였다. 뉴욕타임즈지의 크레이그 휘트니(Craig Whitney)는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로부터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받았으며, 그는 베트남에서의 동맹군의 장래 역할에 초점을 맞춘 한 기사의 끝부분에다 그들이 본 사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그 기사의 첫 머리에서 휘트니는 “한국군은 중부 해안의 방어가 빈약한 지역에 군사적 방패(휘트니는 누구를 위한 방패인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를 제공하고 있었다.”라고 썼다.[[https://www.nytimes.com/1972/11/09/archives/korean-troops-end-vietnam-combat-role.html|관련 기사]] 무튼 두 명의 퀘이커 교도들의 조사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베트남인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임대군인(rented soldiers)’인 한국군은 미라이 학살과 규모면에서 비슷한 일련의 학살을 자행했다. 100여 명 정도가 죽은 각각 별개로 나눠진 12건의 학살사건이 존스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한국군은 이밖에도 20~30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은 수십 건의 또 다른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 밖에 헤아릴 수도 없는 각각 별개의 살인, 강도, 강간, 고문, 그리고 토지 및 민간인 개인이 소유한 재산의 파과 및 방화를 저질렀다. 한국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의 숫자는 총 수천 명 단위에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존스는 이들 ‘연합군’에게 ‘평정된’ 지역 중 임무지역만을 조사했던 것이었다. > > > 2. 이러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징집연령에 해당되는 남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거나 사이공 정부에 소집되었고 또는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 > > 3. 이러한 대량학살은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이라는 것은 한국군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서, 또는 그러한 기습 공격에 대한 경고로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군이 장악한 전 지역의 민간인들은 그들에게 잡힌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지뢰가 폭발한다든지 해서 한국군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경우 이들이 빈번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습격하여 20명 혹은 120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정책은 나치 독일의 정책화 비슷했지만, 남한의 민간인 포로학살은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도중 서유럽에서 자행한 학살들에 비하면, 보다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 > > 4. 이러한 대향학살은 오랜기간 동안 심지어 1972년까지도 행해졌으며 미군당국도 이를 알고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연구소인랜드연구소에서는 1966년 “Viet Cong Motivation and Morale Study”에서 한국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상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엇는데, 이 자료는 기밀처리되어 유포가 억제됐다고 한다.] 미국 관리들이 이런 형태의 ‘평정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보였다거나 혹은 이와 같이 빈번하고도 지속적인 만행에 대하여 어떤 징계조치가 취해졌다는 증거는 전혀없다. 사실상 한국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은 미국에게 용인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미군 당국자는 이를 호의적으로 보기도 했었다는 신뢰할만한 근거도 있다. 콜롬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은 한국군의 그러한 방침은 “수년 동안 미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보고했다. 미국 관리들이 볼드윈에게 때로는 유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보통은 찬사와 함께 그러한 볼드윈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 > > 5. 미 국방부는 한국군의 지속적인 남베트남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1973년 회계연도 예산을 1억 3,400만 달러로 요구하면서(1965~1973년간의 총액은 17억 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의회에서 한국군이 남베트남의 중요한 지역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관리들이 말하는 오웰주의적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닉슨과 웨스트모어랜드 및 평정계획 자체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 >---- > Noam Chomsky·Herman Edward,『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 (The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 Volume I)』, Haymarket Books, 2014, p.365~36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